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코는 그녀를 찾아온 '나'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한다.
하나는 '내'가 그녀를 만나러 왔음에 대해 그녀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는 것.
또 하나는 그녀를 기억하는 것...
어쩌면 내가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외딴 곳이라고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내 안에서 그녀에 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나를 향해 자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던가.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죽을때까지 언제나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또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기억들이
아스라히 희미해져갈 때...
그리고, 어느 덧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
왠지 슬퍼지는 건 [나] 또한 [타인]들에게 있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란 걸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런 때,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준다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감사 받으며 살았다는 걸...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이었던,
'나' 라는 특별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는 걸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작가명: 텐도 아라타 (권남희 옮김)
출판사: 문학동네
정가: 14,800원
책 설명: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 텐도 아라타가 빚어낸
선과 악, 생과 사가 교차하는 묵직한 삶의 드라마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고인을 애도하는 수수께끼 같은 청년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제 140회 나오키 상 수상작
지난 주말, 멀리 떠나는 친구의 선물을 사기 위해 들렀던 서점에서
'지금 이 세상에 꼭 있었으면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라는 문구로 책을 집어 들게하고,
프롤로그 7페이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아 버린 '애도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특별한 책이다.
그 생각 중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는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나 [상실의 시대]와는 다른 ....
평범하면서도 묵직한.. '죽음'이 매우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약간 갸름한 얼굴에 앞머리는 눈을 가릴 만큼 길고, 바래고 해진 옷 차림에, 닳아빠진 스니커즈를 신고, 커다란 배낭을 맨채
잡지나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부고 기사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건사고 소식을 참고 삼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인을 애도하는 '시즈토'
[애도하는 남자]는 이 특별한 남자 '시즈토'의 이야기를 세 명의 화자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애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하이에나처럼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찾아 헤매는 주간지 기자 마키노,
남편을 살인한 죄로 복역하고 출소한 유키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 준코
[애도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의심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비웃으며, 때로는.. 기다리고, 사랑하며 '시즈토'라는 인물을 완성해나간다.
고인이 죽음을 맞이한 장소를 찾아 다니며,
주변인 혹은 고인의 가족들에게서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기억을 나누며 고인이 이 세상에 살았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
그(녀)는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그가 던지는 질문 3가지는 사람들은 가슴속 깊이 묻어놓았던 그 ...또는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도 분명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친구도 아마 그랬을 테지요.
당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남녀 관계나 가족에 대한 애정에 한정해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의 질문으로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와 같이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면서 공부도 하고, 학원에서는 한숨도 쉬고,
집에 가서는 가족과 식사하고, 친구와 메일을 주고 받고, 잠자리에 들고...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아기 때는 피부가 하얘서 병원에서도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얼굴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맹장염에서 입원하자, 집에서 병원까지 2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혼자 걸어와서는,
병실로 들어오며 "엄마"하고 부를 때의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이..
열 살 운동회 때 달리기 도중에 응원하던 아버지에게로 달려와 목에 안겨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아버지가 안고 달려서 골인했을 때의 웃는 얼굴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좋아하는 같은 학교 여학생에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아끼던 의자에 앉아 고민할 때의 진지한 표정이...
예쁜 이름이어서 인상에 남았거든요.
저녁노을이 한창 예쁠 때 결혼을 약속해서, 아기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들었어요."
이 소설을 보며 너무 좋았던 점은, 그리고 무엇보다 슬펐던 점은 ...
'개인'이라는 한 개체가 주는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에서 오는 의미와 소중함을
너무나 다정하게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하거나 받았던 사람.
그로써, 누군가의 기억속에 남고, 계속계속 그리워할 사람.
살아있음으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음으로 인해 받았던 모든 사랑과 기쁨들.
이 모든 '누군가'의 의미가 책 속에 살아있었다.
여자:˝무명이란 참 무섭지요.˝
남자:˝뭐라고?˝
여자:˝게릴라가 115명이 전사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아?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는 상태지.
아내나 아이들이 있었는지? 연극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115명 전사라는 것 말고는-.˝
- 장 뤽 고달의 ˝미치광이 피에로˝ 中 (하루키 단편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오늘 날, 사람들에게 타인이 지닌 '개인'이란 의미는 스스로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단어 외에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루키의 단편집 첫머리에 나와있는 이 글을 보며 그 누구에게도 특별하지 않을 나의 인생이
어딘가의 '115명 전사'와 같이 묶일 것이란 게 새삼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그러한 때, 나를 기억해 주고, 나를 위해 애도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준다면... 조금은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경중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죽음도 차별이나 구별없이 그저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했고,
거기서 희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작가 인터뷰 中
"정말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거지?"
그녀는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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